교토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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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국립박물관
古社寺保存法(『官報』4180 明治30年)

옛 신사와 사찰 보존법[고사사보존법]『관보』 4180, 메이지 30년(1897),
국립국회도서관 웹사이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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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the national treasure was born

'국보'가 탄생한 날

<옛 신사와 사찰 보존법[고사사보존법]> 제정

일본의 연호가 게이오 4년에서 메이지 원년(1868)으로 바뀔 무렵, 메이지 새 정부는 천황제와 고유 종교인 신도를 축으로 하여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신사의 불교적인 색채를 없애고자 신불분리령을 내렸습니다. 일련의 포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불상으로 신을 모셔 왔던 신사에 불상 철거와 범종 해체 등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폐불훼석 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불교와 관련한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또, 문명개화 세태의 여파로 옛 문화를 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아울러 메이지 4년(1871)에는 신사·사찰 영지의 몰수 명령인 사사령상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신사·사찰이 대다수의 부지를 몰수당하면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 또한 문화재가 흩어지는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제정한 것이 '옛 신사와 사찰 보존법[고사사보존법]'입니다. 이 법률에 따라 '역사의 증거 또는 미술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동시에 국보 문화재를 유지하고 수리하기 위한 보존금이 지급되는 형태로 체계가 갖춰졌습니다.

'옛 신사와 사찰 보존법[고사사보존법]'이 제정되어 국보가 탄생한 것은 메이지 30년(1897) 6월 5일의 일입니다. 이에 앞서 5월 1일에는 교토국립박물관의 가장 첫 모습인 <제국교토박물관>이 탄생하였습니다.

개관 당시의 본관 전경준공 당시의 정문

위: 개관 당시의 본관 전경 / 아래: 준공 당시의 정문(현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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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pening of the Museum

개관

교토국립박물관이 탄생하기까지

메이지 4년(1871) 10월, 일본 최초의 박람회인 교토박람회가 니시혼간지 절의 서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메이지 6년(1873)부터는 천황의 거처인 고쇼[御所]의 일부 공간으로 박람회 개최 장소를 옮겼고, 상설박람관의 설치도 허가되었습니다. 아울러 메이지 8년(1875)에는 교토부가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였는데, 이 사업은 곧바로 중지되었습니다.

제국박물관의 건설 계획이 다시 추진된 것은 메이지 22년(1889)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메이지 30년(1897) 5월 1일에 <제국교토박물관>이 개관하였습니다. 메이지 33년(1900)에는 <교토제실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것이 훗날 교토국립박물관이 됩니다.

박물관 개관에 있어서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적인 기반을 잃은 사찰과 신사의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이 하나의 큰 축을 이루었습니다. '옛 신사와 사찰 보존법[고사사보존법]'이 제정된 메이지 30년(1897)은 문화재 보호 행정의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준공 직후의 본관 중앙홀 내부

준공 직후의 본관 중앙홀 내부

준공 직후의 본관 현관홀 내부

준공 직후의 본관 현관홀 내부

片山東熊

본관 설계자

가타야마 도쿠마(1854~1917)

궁내성에서 다양한 건축물의 신축과 수리 사업에 관여하였습니다.
대표작은 국보 <영빈관 아카사카 이궁>입니다.

Column 01

교토국립박물관의 설립으로 이어진
교토박람회

가에이 4년(1851),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을 중심으로 만국박람회 붐이 일었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박람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개최된 것이 메이지 4년(1871)의 교토박람회입니다. 메이지 6년(1873)부터는 천황의 거처인 고쇼[御所]의 일부 공간에서 매년 개최하게 되어 상설 박람관도 건립되었습니다.

메이지 8년(1875)에는 교토부가 교토박물관의 건설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교토의 귀중한 문화재를 다수 기탁받아 전시하기로 되어 있었던 이 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교토박람회의 흥행을 이끈 과학자 아카시 히로아키라였습니다. 부지도 박람회 개최 실적이 있는 고쇼[御所] 일대로 선정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연과학도 포함한 다분야의 자료를 다루는 종합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계획은 중단되었고 메이지 22년(1889)에 다시 제국박물관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듯 교토박람회부터 다양한 모색을 거쳐 박물관의 설립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개관 직후의 본관 전경

개관 직후의 본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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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perial Gift Museum of Kyoto

은사교토박물관

황실의 박물관에서 시민의 박물관으로

메이지 30년(1897)에 개관한 제국교토박물관은 황실과 관련한 보물을 비롯하여 사찰과 신사에 전해 내려온 미술 공예품을 다수 수장하고 있었습니다. 궁내성 관할이었으나 다이쇼 13년(1924)에 황태자(훗날의 쇼와 천황)의 결혼을 기념한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교토시에 하사되었습니다. 이로써 황실의 박물관에서 시민의 박물관으로 크게 방향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교토국립박물관의 기본자세는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본관 내부

관람객으로 붐비는 본관 내부

살짝 멋을 내고 예술을 감상하러 외출하던 당시 사람들의 감각이 전해집니다. 당시에는 창문과 천장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을 채택하였으나 자외선은 전시품 보존에 좋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인공조명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름 강좌와 전시 강좌(지금의 토요 강좌)의 시작

여름 강좌 전시 강좌(지금의 토요 강좌)

강좌는 다이쇼 13년(1924)부터 개최되었습니다. 사진은 쇼와 11년(1936)의 여름 강좌로, 본관(현재 메이지 고도관) 중앙홀의 풍경입니다(묘친 쓰네오, <기법으로 살펴보는 헤이안시대의 조각>). 강좌를 들으러 온 스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쇼와 13년(1938)부터 8년간은 여름 강좌가 중단되었습니다.

당시의 포스터
당시의 포스터

당시의 포스터

다양한 기획으로 전시를 홍보하는 점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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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oving Facilities

내실을 다져나가는 시설

개관 이래 이어져 온 문제 해결을 위해

개관 이래,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렸던 교토국립박물관은 조금씩 시설과 수장품의 내실을 다져나갔습니다.

그 예로, 쇼와 5년(1930)에는 새로운 수장고를 준공하였고 쇼와 9년(1934)에는 본관 정면의 입구 양옆에 진열판매소(지금의 뮤지엄샵에 해당)와 매표소·신발보관소를 설치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교토시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쇼와 4년(1929)에 2구제에서 5구제로 행정구역을 개편했습니다. 새롭게 히가시야마구가 설치되었으며 히가시야마구 청사도 건립되었습니다. 이 청사는 훗날인 헤이세이 14년(2002)에 교토국립박물관이 교토시로부터 매입하게 됩니다.

본관 정면 입구 양옆 건물
―80년 전의 뮤지엄샵―

지금까지도 본관에는 진열판매소(사진 왼쪽)와 매표소·신발보관소(사진 오른쪽)가 설치되었던 흔적이 외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본관 정면 입구 양옆 건물

본관 정면 입구 양옆 건물
―80년 전의 뮤지엄샵―

지금까지도 본관에는 진열판매소(사진 왼쪽)와 매표소·신발보관소(사진 오른쪽)가 설치되었던 흔적이 외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엽서 세트

당시의 엽서 세트

쇼와시대 초기에 진열판매소에서 판매했던 엽서 세트.
본관 전시실과 외관 사진, 평면도 등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옛 수장고 <기술자료참고관>

옛 수장고 <기술자료참고관>

제실박물관 시기의 수장고는 목조 토벽 건물이 전부였기 때문에 안전한 수장고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쇼와 5년(1930)에 준공한 이 수장고는 습도 관리를 위해 높은 지형에 세워진 것이 특징입니다. 쇼와 41년(1966)에 신관을 준공할 때까지 사용했습니다.

옛 히가시야마구 청사

옛 히가시야마구 청사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어진 귀중한 근대 건축. 현재는 교토국립박물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Column 02

교토국립박물관 토막지식

부지의 역사

교토국립박물관의 부지는 고시라카와 법황(1127~1192)의 처소였던 호주지도노의 일부였습니다. 렌게오인 산주산게도 절도 원래는 그 일부였기 때문에, 절의 남대문에서 일직선상의 북측에 교토국립박물관의 남문과 헤이세이 지신관의 현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후 모모야마시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창건한 호코지 절 대불전 부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가 정비한 회랑과 남문의 유구가 교토국립박물관의 부지 내에 존재하여,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헤이세이 지신관 앞의 수반 등에는 초석이 놓였던 자리가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헤이세이 지신관은 이러한 역사적 콘셉트를 살리는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헤이세이 지신관에 표시된 호코지 절의 초석이 놓였던 장소

헤이세이 지신관에 표시된 호코지 절의 초석이 놓였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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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to National Museum

교토국립박물관

다시 국가의 손으로

전쟁 중에 발생한 직원 징병과 작품 분실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한 후, 교토국립박물관은 교토시에서 국가의 문화재보호위원회(문화청의 전신)로 이관되어 쇼와 27년(1952)에 <교토국립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이는 교토 시민의 박물관에서 다시 국가의 박물관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본관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부지 내부는 황폐했습니다. 이 때문에 근대적인 수장고와 사무소가 딸린 별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이관 기념 <국유 동양 미술 명품전>의 목록

이관 기념 <국유 동양 미술 명품전>의 목록

교토시에서 국가로 다시 이관된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특별전은 <국유 동양 미술 명품전>이었습니다. 목록의 표지에 적힌 "국유(國有)"라는 표기가 뚜렷합니다.

청풍회

<청풍회> 명칭의 유래가 된 제1회 총회 장소 <청풍장>
(옛 사이온지 긴모치 별장 / 교토대학 관리)

쇼와 28년(1953), 교토의 재계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 후원단체 <청풍회[세후카이]>가 발족했습니다. 이후 이 후원 단체는 교토국립박물관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교토국립박물관 소속 연구원이 안내하는 회원 대상 미술 감상회와 견학회를 주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