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개요
- 전시명
-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 개최 기념 특별전 <일본, 미의 도가니-문화 교류의 궤적>
- 기간
-
2025년 4월 19일(토) ~ 6월 15일(일)
<전시 기간 구분>
전기 전시: 2025년 4월 19일(토) ~ 5월 18일(일)
후기 전시: 2025년 5월 20일(화) ~ 6월 15일(일)
※ 일부 작품은 위 시기 외에도 전시 교체를 실시합니다.
- 장소
-
교토국립박물관 헤이세이 지신관
- 교통 안내
-
JR선, 긴테쓰 전차, 게이한 전차, 한큐 전차, 시 버스
오시는길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2025년 5월5일(월·공휴일) 개관, 5월7일(수) 휴관
- 개관 시간
-
9:00 ~ 17:30 (매표마감: 폐관 30분 전)
금요일 9:00 ~ 20:00 (매표마감: 폐관 30분 전)
- 관람요금
-
일반 2,000엔 (1,800엔) 대학생 1,200엔 (1,000엔) 고등학생 700엔 (500엔) - 괄호 안의 요금은 사전 판매 요금 및 단체 요금입니다.
- 단체는 20명 이상을 의미합니다.
- 사전 판매 티켓은 2025년 2월 19일(수)부터 4월 18일(금)까지 플레이가이드 등에서 판매합니다.
사전 판매 티켓, 할인 티켓, 오리지널 굿즈가 딸린 사전 판매 티켓에 관한 정보는 특별전 공식 웹사이트(일본어로만 제공)에서 알려 드립니다. - 대학생·고등학생은 학생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 중학생 이하는 무료입니다.
- 장애인(*)과 동반자(1명)는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 관련 자료를 제시해 주세요. - 캠퍼스 멤버즈 회원은 학생증이나 교직원증을 제시하실 경우, 각 해당 관람료에서 500엔씩 할인됩니다. 단, 당일 정문[남문] 매표소에서만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특별전 워크숍
-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세요.
※ 워크숍은 일본어로 개최됩니다.
- 특별전 기념 강연회
-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세요.
※ 기념 강연회는 일본어로 개최됩니다.
- 오디오 가이드
-
대여 가이드기 버전
- 【대여 요금】
- 1대 650엔 (세금 포함)
- 【수록 시간】
- 약 35분
- 【제공 언어】
- 일본어·영어
- 【대여 접수 시간】
- 9:00 ~ 17:00
금요일 9:00 ~ 19:30
앱 버전
- 【판매 가격】
- 800엔 (세금 포함)
- 【제공 언어】
- 일본어
- 【제공 기간】
- 2025년 4월 19일 ~ 6월 말(예정)
- 특별전 도록
-
자세한 사항은 도록∙목록∙관련서적 등
- 주최
-
교토국립박물관, 아사히신문사, NHK교토방송국, NHK엔터프라이즈 긴키
- 후원
-
공익사단법인 2025년일본국제박람회협회
- 협찬
-
Club Tourism, 게이한홀딩스 주식회사, DAIKIN INDUSTRIES, LTD., 다이와하우스공업 주식회사, TAKENAKA CORPORATION, NISSHA
- 협력
-
JAPAN AIRLINES
- 특별전 공식 웹사이트
- 특별전 공식 SNS
-
- X: @rutsubo2025
- Instagram: @rutsubo2025
전시의 이모저모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 개최를 기념하여 문화 교류를 테마로 일본 미술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람회를 마련했습니다.
예로부터 일본 열도에는 바다를 낀 왕래를 통해 다른 문화가 유입되었고 그 만남 속에서 다양한 미술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작품 하나하나가 풍부한 교류로
맺어진 결실이며 말하자면 일본이라는 '도가니' 속에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어 생겨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 무렵-기원후 3세기 무렵)·고훈시대(3세기 무렵-6 세기 무렵)부터 메이지시대(1868-1912)까지의 회화, 조각, 묵적,
공예품 등 약 200점의 문화재를 엄선하여 일본 미술에 숨겨진 문화 교류의 궤적을
따라가 봅니다.

국보 풍신뇌신도(바람 신과 천둥 번개 신 그림) 병풍
다와라야 소타쓰 그림
교토 겐닌지 절 소장
(전기간 전시)
프롤로그 만국박람회와 일본 미술
Ⅰ 세계가 본 일본 미술
메이지 일본이 국제 사회에 나왔을 무렵, 서양 미술 시장에는 에도시대(1615-1868) 이전에 유입된 이마리 도자기나 수입 칠기, 무사의 도검 휴대를 금지하는 폐도령이 내려지고 양복을 입게 되면서
무용지물이 된 도검의 외장 장식, 인롱(허리에 차는 휴대 용기), 네쓰케(인롱을 고정하는 장신구), 그리고 에도시대 풍속화인 우키요에 등이 넘쳐났으며 그러한 것들로 일본 미술의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는 미술품 수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작은 일본 붐이 일어 호쿠사이(1760-1849)나 고린(1658-1716)의 작품이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연달아 개최된 만국박람회에는 공예품이나 공업 제품 등을 주로 전시하는 공예관과 서양의 예술관에
기초한 회화, 조각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유럽과 미국에서 팔리는 것들을 골라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식산흥업을 꾀했고 서양 미술 관점에 입각한 감상용 작품
제작도 장려해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 국위선양에 힘썼습니다.

후가쿠(후지산) 36경: 개풍쾌청(여름 남풍 부는화창한 아침)
가쓰시카 호쿠사이 그림
야마구치현립 하기미술관·우라가미기념관 소장
(전기 전시: 4/19 ~ 5/18)
Ⅱ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던 일본 미술
메이지 정부는 만국박람회 참가를 통해 서양의 이국취미를 만족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이 '미술'과 '역사'를 갖는 '문명국'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메이지 33년(1900) 에 열린 파리만국박람회에서는 서양 방법론에 따른 일본의 첫 미술사 책을 프랑스어로 편찬하고 호화로운 장정을 붙여 전시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 무렵-기원후 3세기 무렵)부터 설명이 시작되는 이 일본 미술사에는 미술사가 오카쿠라 덴신(1863-1913) 등이 옛 신사와 절의 보물을 조사해 밝혀낸 성과가 반영되어 현재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명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듬해인 1901년에는 이 책의 일본어판이 간행되어 이른바 일본 정부의 공식 미술사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 우리가 이미지화하고 있는 일본 미술사의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한편, 고린 스타일의 작품이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떨치면서
일본에서도 소타쓰(생몰년 모름)를 시작으로 하는 에도시대 회화
유파로 '린파'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일본 미술의 전형으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 미술사는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근대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화상으로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Histoire de l’Art du Japon (일본미술사)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임시박람회사무국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전기간 전시, 페이지 교체 있음)
제1부 동아시아 속 일본의 미술
Ⅰ 왕래가 이끌어낸 기술과 미
메이지 정부는 국외에 일본다움을 강조하고 알리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 남아 있는 많은 미술품은 이문화 요소를
풍부하게 보여주며 활발한 해외 교류를 말해 줍니다.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 무렵-기원후 3세기 무렵)에는 대륙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도 넓은 아시아 문화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청동기나 철기, 견직물, 유리 등의 제품과 함께 신기술이
들어오고 곧 일본에서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3세기 중반 무렵에 시작되는 고훈시대에는 학문과 문화를 수입하고 6세기 중반 무렵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해집니다. 7-8세기 아스카·나라시대에는
견수사, 견당사가 파견되어 중국의 최첨단 물건, 기술과 함께 정치
제도도 도입됩니다. 나아가 중앙아시아의 예능 등 중국 당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정착한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삼채 명기
낙양(뤄양) 북망산 출토로 전함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전기간 전시)
Ⅱ 가르침을 찾아서
8-9세기에 해당하는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시대 초에는 외교 사절단을 태운 배가 대륙과 일본 열도를 오갔습니다. 이 배에는 학자나 기술자, 승려도 함께 탔습니다. 사절단은 정치와 경제를 교섭할 뿐만 아니라 공예품, 선진 기술, 최신 사상을 일본 열도에 들여왔습니다. 특히 불교는 병을 낫게 하고 사후의 평안을 보장하며 나라를 지키고 날씨를 움직이는 힘으로 여겨졌습니다. 목숨을 건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감진(688-763)과 같은 고승이 대륙에서 건너와 불교 규범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했고 일본에서는 사이초(766/767-822), 구카이(774-835), 엔닌(794-864), 엔친(814-891) 등의 승려들이 중국 당으로 건너가 경전이나 도상, 의례 규칙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불교가 도래하면서 인도, 중국, 한반도, 동남아시아 지역의 풍부한 종교 미술이 일본 열도에도 들어와 헤이안시대의 궁정 의례나 절의 불당 안을 수놓았습니다.

국보 마키에 건칠 보상화·가릉빈가무늬 책자함
교토 닌나지 절 소장
(전기간 전시)
Ⅲ 가라모노: 중국을 향한 동경
무사가 등장하고 12세기 말 가마쿠라시대가 되면 일본 각지에 상공업이 발달하지만, 중국 문물의 매력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공과 사 할 것 없이 경전이나 아름다운 도자기, 견직물 등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도항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선종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불교의 유입으로 이어졌고 일본 문화 예술에 새로운 바람을 계속해서 불러일으켰습니다. 14-16세기 무로마치시대에도 무사나 승려는 중국을 동경했습니다. 중국 문물을 '가라모노'라고 부르며 모방해야 할 본보기로 삼아 귀하게 여겼고 희소하고 값비싼 진품을 손에 넣지 못하면 그럴싸한 대체품을 만들어 냈으며 그러한 경험에서 독자적인 제품을 낳았고 새로운 유파가 만들어졌습니다. 모방과 개조는 이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의 '십팔번', 즉 가장 뛰어난 장기입니다.

국보 화엄종 시조 그림 전기: 의상 그림 권제2 (부분)
교토 고산지 절 소장
(전기간 전시, 권 교체 있음)
토픽: 오해, 개조, 그리고 MOTTAINAI (아까움)
동경하는 외래 문물을 모방할 때는 늘 작은 오해가 생겨났고 자신의 기호에 맞춰 개조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직 본 적이 없는 마차를 살아 있는 것으로 이해해 표현하거나 그림이나 모피로만 알던
데서 호랑이와 표범을 혼동했으며 원래 디자인에는 없더라도 자신들에게 소중한 컨셉을 장식에 공들여 더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통치자가 교체되면 전 정권은 타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외래 문물은 그 귀중한 가치 때문에 파손된 것이라면 고쳐서라도 계속해서 소중하게 보존했습니다. 이는 물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본다운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문화재 청동거울(신인거마화상경)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가와이정 사미타 타카라즈카고분 출토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전기간 전시)

청동거울(변형신인거마화상경) 출토지 미상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전기간 전시)
제2부 세계와 만난 일본의 미술
Ⅰ 지구 규모의 거센 파도
대형 선박과 화약, 종교를 가지고 아시아 바다의 교역망을 휩쓴
것이 대항해시대의 서양인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비단, 약, 향료
등 아시아 각지의 산물을 열렬히 구하러 다녔고 그 무역 권리를 둘러싸고 각국의 상인들이 치열한 싸움을 펼쳤습니다. 일본의 위정자는 교역을 원했지만, 외국의 침략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창구를 좁혀 무역을 관리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위정자가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아시아 바다에서는 원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의 국가 의식을 넘은 영역에서 활약하고 때로는 전란 등으로 이주를 강제당하면서 지식과
기술, 문화를 각지에 전했습니다. 그렇게 전해 내려온 문물들이 일본 유력가들의 생활을 장식했습니다. 중국 문물을 귀하게 여기는
풍조는 계속되었지만, 중국('가라') 문물('모노')을 뜻하던 '가라모노'라는 말은 '박래품', 즉 다른 나라에서 배로 실어 온 물품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류큐나 동남아시아, 베네치아의 산물까지도 '가라' 라는 이름 아래 애호되었습니다.

중요문화재 철직 새·동물무늬 진바오리(전장에서 입는 겉옷)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용
교토 고다이지 절 소장
(전시: 4/19 ~ 5/11)
Ⅱ 글로벌 시대의 로컬 제품
17-18세기에 걸쳐 글로벌하게 상품이 유통되는 시대에는 생산지가 다양해지고 각지에서 특유의 소재와 기법으로 유사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제작된 흑단 가구가 서양 목조로
본떠지고 일본에서 마키에라는 칠공예 기법으로 제작된 가구가 같은 규격으로 주문 제작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서양의 유리
제품과 같은 규격으로 자기나 칠기로 된 사각 술병이 만들어졌으며
일본과 중국 자기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자기 공방에서는 칠기 장식을 모방한 자기 식기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에도시대(1615-1868)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담뱃대나 가루타(카드놀이)를 칠기 도안으로 쓰거나 희소한 외래 염직물을 기모노로 만드는 식으로 아이디어와 센스, 재력에 따라 이국정취를 생활
속에 도입해 갔습니다.

마키에 나전 꽃·넝쿨무늬 접이식 의자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전기간 전시)
Ⅲ 기술 이식과 지적 호기심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전쟁, 종교, 식민지주의 등에 휩쓸려
여의치 않게 이주를 하고 그 결과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문화에 기술을 이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출병 후 한반도의 도자기 기술이 서일본 각지로 뿌리내린 것은 유명합니다. 에도시대(1615-1868)에는 조선 외교사절단이 화평과 우호를 위해 12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에도로 향하는 사절단의 화려한 행렬은 수백 명에 이르렀고 각지에서 조선 열풍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지식인들 간의 교류에서 나온 시와 회화는
지금도 일본 각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데지마에서 에도로 향하던 네덜란드 상관을 이끄는 수장 주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박물학 전문가나 예술가 기질의 사람도 있어 서양 문화나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호기심 왕성한 일본인과의 생생한 교류 증거도 많이 전해집니다.

스물네 명의 효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건권 (부분)
도사 미쓰스케 외 그림
(전기간 전시)
Ⅳ 신 중국을 향한 동경
문화 교류라고 하면 현대에서는 서양 문화와의 교류를 떠올리기
쉽지만, 근세를 통틀어 중국을 향한 동경이 수그러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특히 교토에서는 에도시대 초기에 새롭게 중국 문화가 도입되면서 그 동경에 박차가 가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국 명시대 말 청시대 초의 동란기에는 많은 중국인이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그중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교토 우지에
오바쿠산 만푸쿠지 절을 연 은원융기(1592-1673)입니다. 명조체
서체나 강낭콩, 원고지 등을 일본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술에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전차(녹차), 문인 취미를 토대로 한
시와 글씨, 그림, 중국 색 짙은 불상, 다양한 악기 등의 영향으로 중국 청 왕조의 문물이 일본에 유행하게 됩니다. 에도시대에 생겨난
새로운 중국 취미는 쇼와시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큰 조류를 이루었습니다.

십육나한 좌상 중 라훌라존자상 범도생 작
교토 만푸쿠지 절 소장
(전기간 전시)
에필로그 문화의 벽을 넘는 것은 누구인가 ?
미술은 문화 간의 벽을 넘는가. 이 물음을 생각하기 위해 <기비
대신 입당 두루마리 그림>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1932년에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구입하고 이듬해에 공개했습니다. 때마침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보스턴 시민들은 이 작품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당시 보스턴에 머물던 미술사가 야시로 유키오(1890-1975)는 회상합니다. 그는 예술이 가진 보편적인 매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러기에 더욱 미술의 힘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이용되는 것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미술은 분명 문화의 벽을 넘습니다. 정치 상황과는 상관없이 시대를 넘고 언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도량과 자세, 다른 문화와 만나는 우리
자신의 힘에 달린 것인지도 모릅니다.